성공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마음의 동요
침체를 겪을 때는 정말 너무 힘들고 지치고 그만두고 싶어 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오르는 감정들과 마음속의 요동침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헤아려주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끼라리도 잘 지켜야만 하고 지금은 굉장히 기분이 좋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해보는 것을 추천하는데 제일 좋은 시간은 밥을 먹고 하는 것입니다.
파라마운트의 오랫동안 침체
파라마운트의 오랫동안 침체를 겪었으나 아이즈너는 딜러와의 협업을 통 해 영화사를 할리우드에서 가장 뜨거운 제작사로 탈바꿈시켰다 토요일 밤의 열기와 그리스는 플래시 댄스와 애정의 조건 등의 영화가 줄줄이 놀라운 성 공을 거뒀던 것이고 이런 획기적 반전을 만들어내는 데는 딜러의 역할도 분명히 있었으나 아이즈너는 영화사 성공의 주된 원동력이 본인이라고 생각했고 어쨌거나 돈이 되는 영화를 만드는 확실한 공식을 발명한 사람은 자신이 니까 말이며 이 공식은 저비용에 크게 의존했고 그리고 저비용은 아이즈너가 평생 집착해온 부분이었으며 이를 위해 모든 영화는 시작부터 콘셉트가 훌륭해야 하고 그 콘셉트는 기존에 없던 것이어야 하고 요약하기 쉬우면서 드라마틱해야 했으며 경영진은 비싼 작가와 감독 배우를 고용해도 되지만 그 바탕이 되는 콘셉 트가 약하면 세상의 모든 돈을 쏟아부어도 낭비일 뿐이었으며 콘셉트가 훌륭한 영화는 저절로 팔린다 이런 식으로 영화사가 비교적 저렴한 영화를 다량 찍 어내면 빅히트는 치지 못하더라도 꾸준한 수입이 확보되며 이런 생각은 1970 년대 후반의 블록버스터 중심주의와 반대되는 것이었지만 파라마운트에서 아이즈너가 보여준 명백한 수익성 앞에 누가 감히 반박을 할 수 있을까 아이즈너는 이 공식을 문서로 만들어 영구화했고 이 문서는 이내 할리우드 곳곳으로 복음처럼 전파됐으며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파라마운트에서 딜러와 스포트라이트를 나눠 받고 CEO들을 기쁘게 하느라 애쓰고 마케팅 담당 및 재무 담당자들과 싸우다 보니 아이즈너는 이제 한계에 달했고 아무 제약 없이 본인의 영화사를 운영하 고 싶었다 자신이 개발한 공식과 한 번도 멈춰본 적 없는 본인의 야망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크고 수익성 높은 엔터테인먼트 제국을 구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아이디어와 성공에 남들이 업혀가는 것도 이제는 넌덜머리가 났다 혼자 꼭대기에 서서 모든 걸 지휘하고 공도 독차지하고 싶었습니다.
디즈니의 구원자로 소개
그 1984년의 여름 이토록 중요한 커리어의 전기를 내내 고민한 끝에 아이즈너는 마침내 자신의 야망을 이뤄줄 완벽한 타깃을 정했고 바로 월트 디즈니가 사망한 이래 월트 디즈니 영화사는 시간이 멈춰버린 듯했으며 해마다 조금씩 더 이상해지고 있었으며 회사는 따분한 남성 전용 클럽처럼 운영됐고 많은 경영진이 점심을 먹고 나면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았고 오후에는 카드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거나 사내에 있는 사우나에 모여 쉬 었다가 해고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4년마다 애니메이션을 하나씩 만들었 고 1983년에는 허접한 실사 영화 세 편을 제작했고 1968년 러브 버그 이후 히트 영화는 단 한 편도 없었으며 버뱅크에 있는 디즈니 촬영장은 귀신이라도 1950년대 시외버스 주차장 같은 곳이라고 했고 그러나 그렇게 다 쓰러져간다는 점이 아이즈너에게는 자신의 마법을 발휘 하기에 완벽한 장소라는 뜻이었으며 디즈니 제작소와 회사는 앞으로 올라갈 길 밖에 없고 이사회는 적대적 인수를 피하고 회사의 실적을 되돌리기 위해 필 사적이었으며 아이즈너는 얼마든지 그가 원하는 조건으로 수장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월트 디즈니의 조카로 당시 최대 주주이던 로이 디즈니 Rory Dierney에 게 자신을 디즈니의 구원자로 소개했고 그리고 파라마운트보다 더 큰 드라마틱한 실적 전환을 만들어낼 야심 찬 계획을 상세하게 펼쳐놓았고 로이가 넘어왔으며 로이가 선택한 만큼 이사회도 아이즈너의 취임을 승인했고 1984년 9월 아이즈너는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CEO 겸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워너 브로스의 수장을 지낸 프랭크 웰스 Frank Wells가 회장 겸 최고 운영책임자 COXO로 임 명됐고웰스는 회사의 비즈니스 측면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었고 모든 사안에서 최고 책임자는 아이즈너였고 웰스는 아이즈너를 보좌하는 역할에 불과했습니다.
들어보지 못한 연속 흥행
아이즈너는 곧장 작업에 착수했고 그는 회사에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실시해 1000명이 넘는 직원을 내보냈고 경영진은 파라마운트 출신들로 채웠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제프리 카젠버그 Jeffrey Kizenixrg 1950-였고 파 라 마운트에서 아이즈너의 오른팔이었던 카젠버그는 월트 디즈니 영화사의 회 장으로 임명됐고 카젠버그는 거친 성품에 때로는 대놓고 무례했지만 할리우 드에서 카젠버그만큼 효율적이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없었으며 그는 뭘 시켜 도 결과를 내놓을 사람이었으며 몇 달이 지나고 디즈니는 아이즈너의 공식에 따라 놀라운 히트작들을 줄줄 이 내놓기 시작했고 아이즈너가 초반에 출시한 17개 영화 중 15개가 이익을 냈고 할리우드의 그 어느 영화사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연속 흥행이었으며 아이즈너가 웰스와 함께 버뱅크의 사업장 구석구석을 탐방 중이던 날이었다 두 사람은 디즈니의 기록 보관소에 들어갔다가 디즈니의 전성기에 제작된 만화 수백 편을 발견했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으며 끝도 없이 펼쳐진 선반 위에 디즈니의 위대한 클래식 애니메이션 히트작들이 잔뜩 쌓여 있었으며 보물을 발견한 아이즈너는 눈이 반짝했고 이 만화와 애니메이션들을 비디오로 재출시하면 모두 그대로 이익이 될 것이었으며 이 만화들을 기초로 다양한 디즈니 캐릭터를 판매할 매장도 만들 생각이었으며 디즈니는 사실상 캐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금광이나 다름없었고 아이즈너는 채굴에 가장 능한 사람이었다 얼마 후 캐릭터 매장들은 문을 열었고 비디오는 불티나게 팔렸다 히트 영 화들이 계속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줬고 디즈니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 고 치솟았다 이제 할리우드에서 가장 뜨거운 영화사는 파라마운트가 아니 라 디즈니였고 좀 더 대중적인 존재감을 쌓고 싶었던 아이즈너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월트 디즈니가 직접 진행을 맡았던 디즈니의 원더풀 월드라는 한 시간짜리 TV 프로그램을 부활시키기로 했으며 이번에는 본인이 진행을 맡으면 됐고 아이즈너는 카메라 앞에서 타고난 연기자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차차 자신을 좋아하리라 생각했고 자신도 월트 디즈니처럼 아이들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었으며 실제로 아이즈너는 어쩐지 자신이 월트 디즈니와 마법처럼 서로 통하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고 마치 본인이 단순한 회사의 수장이 아니라 월트 디즈니의 진짜 아들이나 후계자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번에 개장할 곳
그러나 그 모든 성공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마음의 동요는 잊지 않고 다시 찾아왔으며 그는 새로운 모험 더 큰 도전이 필요했고 이내 그 도전 거리를 찾아냈고 월트 디즈니는 유럽에 새로운 놀이공원을 만들 계획을 갖고 있었으며 가장 최근인 1983년에 개장한 도쿄의 디즈니랜드는 성공적이었으며 놀이공원 담 당자들은 새로운 디즈니랜드 후보지를 두 곳으로 압축해놓았는데 하나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인근이었고 다른 하나는 파리 근처였고 경제성을 따지면 날씨가 훨씬 좋은 바르셀로나가 더 유리했지만 아이즈너는 프랑스의 후보지를 선택했고 이번에 개장할 곳은 단순한 놀이공원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선언이 될 것이라 자신했고 아이즈너는 세계 최고의 건축가들을 고용할 작정이었으며 유로 디즈니로 알려진 이곳에는 다른 놀이공원들처럼 평범한 섬유 유리로 만든 성城이 아니라 분홍 벽돌로 쌓아 올리고 창에는 수공예 스테인드글라스로 온갖 동화 속 장면을 연출한 성들이 있을 것이고 콧대 높은 프랑스 엘리트들도 흥분해서 방문하는 장소가 될 것이고 아이즈너는 건축을 사랑했고 이곳에서 그는 현대판 메디치 르네상스 시기에 이탈리아의 명문가 메디치 가문은 예술을 크게 후원해 문화 발전에 이바지했고 - 옮긴이가 될 수 있었으며 몇 해가 지나고 유로 디즈니에 들어간 비용은 산더미처럼 불어났고 평소에 가지고 있던 재무 실적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내려놓은 아이즈너는 이 놀이동 산을 제대로 만들기만 하면 사람들이 절로 찾아와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을 거라고 생각했고 1992년 놀이동산은 계획대로 오픈했고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즈너가 프랑스인들의 취향이나 휴가 습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는 것이 분명해졌으며 프랑스인들은 놀이기구를 타려고 줄 서서 기다리는 것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고 특히나 날씨까지 나쁜 날에는 더더욱 말이며 다른 놀 이동산과 마찬가지로 유로 디즈니에서도 맥주나 와인은 팔지 않았는데 이게 프랑스인들에게는 마치 신성모독과 같은 일이었으며 호텔룸은 너무 비싸서 가 족 단위로 하루 이상을 묶기가 힘들었고 그리고 세부적인 것들에 그토록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분홍 벽돌로 지은 성들은 진짜 성의 조잡한 아류 같았다 입장객 수는 아이즈너가 예상한 규모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고 건축 과정에서 디즈니가 끌어다 쓴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고 방문객들로부터 유입되는 돈으로는 이자조차 감당할 수 없었으며 사태는 점점 재앙의 모습을 갖춰 가고 있었으며 아이즈너의 찬란한 커리어에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마침내 현실을 인정하게 된 아이즈너는 프랭크 웰스를 탓하기로 했고 이 프로젝트의 재 무 건전성을 감독하는 일은 웰스의 담당이었습니다.
모든 성공을 하더라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퇴색이 되기도 하고 빛이 바랜다고 표현하는데 우리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고 어쩌면 디즈니는 그런 것들을 다 알고 있었는지 모르며 건축가들을 고용한 그 사장은 지금은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고 알게 되면 공유하기로 합시다.
출처:인간 본성의 법칙